온수풀이 따뜻해도 제주의 겨울바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온수풀이 따뜻해도 제주의 겨울바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12월 말의 제주도는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았다

원래는 크리스마스 연휴에 해외로 나갈까 고민했었다. 호놀룰루호텔을 검색해 보다가 터무니없는 연말 비행기 값에 좌절하고, 차라리 그 돈으로 국내에서 제일 좋은 곳을 가보자며 제주도로 방향을 틀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맞춰 제주 서귀포 강정동 쪽에 있는 더 시에나 리조트를 예약했다. 1박에 거의 90만 원에 육박하는 비용이었지만, 연말이니까 이 정도는 써도 되겠지 하는 보상 심리가 컸던 것 같다. 공항에 내려 렌터카를 타고 서귀포로 넘어가는 길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게 흐려지더니, 리조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로비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유리창 너머로 들이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니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온수풀의 온도보다 바람의 세기가 더 중요했던 날씨

이곳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겨울에도 이용할 수 있는 야외 온수풀 때문이었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방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가운을 걸친 채 풀장으로 향했다. 물속은 정말 따뜻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완벽한 호캉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물 밖으로 나올 때였다. 제주의 칼바람은 물에서 젖은 몸에 닿는 순간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선베드에 올려둔 수건을 집으러 가는 그 짧은 몇 초 동안 비명이 절로 나왔다. 결국 따뜻한 물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워서 물속에만 멍하니 한 시간 넘게 갇혀 있었다. 물에서 나오자마자 덜덜 떨며 방으로 뛰어 들어왔는데, 이게 힐링을 하러 온 건지 극기훈련을 하러 온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온수풀의 온도가 아무리 높아도 겨울 제주의 바람 앞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걸 그때 몸소 깨달았다.

로비에서 열린 미니콘서트와 기대하지 않았던 추첨

마침 우리가 투숙한 날 저녁에 리조트 로비에서 크리스마스 미니콘서트가 열린다고 했다. 대단한 공연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방에만 있기 답답해서 슬리퍼를 끌고 내려갔다. 가수 테이가 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지는 느낌은 꽤 좋았다. 연말 느낌도 제법 났고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럭키드로우 이벤트라는 걸 했다. 무려 2,400만 원 상당의 독채 풀빌라 숙박권을 준다고 해서 나도 모르게 쥐고 있던 번호표를 꽉 쥐었다. 물론 이런 운은 평생 나에게 온 적이 없었고, 역시나 다른 가족이 당첨되어 환호하는 모습을 멍하니 구경만 했다. 축하의 박수를 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첨된 사람들은 남은 연말이 얼마나 행복할까 부러워하며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왔다.

바비큐 그릴을 빌렸지만 고기는 안에서 구워 먹었다

저녁은 리조트 안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추가 비용 5만 원을 내고 야외 테라스에서 쓸 수 있는 웨버 그릴을 대여했다. 제주도에 왔으니 흑돼지를 구워 먹으며 연말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테라스 문을 여는 순간,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그릴 뚜껑이 덜컹거렸다. 이 날씨에 밖에서 고기를 굽다가는 고기가 익기도 전에 사람이 먼저 얼어 죽을 것 같았다. 결국 오들오들 떨며 고기 몇 점을 겨우 굽다가 포기하고, 고기와 그릴 채로 방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객실 내에서는 냄새가 심한 음식을 조리하지 말아 달라는 안내문이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환풍기를 최대로 틀고 창문을 살짝 열어둔 채 프라이팬에 고기를 다시 구웠다. 90만 원짜리 고급 객실 가득 삼겹살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문을 살짝 열어둔 틈새로 찬 바람이 들이쳐 방 안에서도 패딩을 입고 밥을 먹어야 했다.

비싼 방을 예약하고 정작 넷플릭스만 보고 온 이유

저녁을 먹고 나니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바람은 더 거세졌다. 리조트 산책로나 야외 정원을 걸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방 안의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몸을 녹인 뒤에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결국 우리가 한 일은 집에서도 매일 보는 넷플릭스 영화를 틀어놓고 귤을 까먹는 것이었다. 밖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가 벽을 타고 웅웅 울릴 때마다 지금 내가 제주도에 와 있는 건지, 동네 모텔에 와 있는 건지 헷갈렸다. 침구류가 확실히 폭신하고 좋긴 했지만, 이 침대에 눕기 위해 지불한 비용을 생각하면 마음 편히 잠이 오지 않았다. 차라리 저렴한 가성비 숙소를 잡고 맛있는 걸 더 많이 사 먹는 게 나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다음 겨울에는 그냥 조용한 방 하나만 잡는 게 나을지도

다음 날 체크아웃 시간인 오전 11시에 맞춰 짐을 싸서 나왔다. 로비 밖을 나서는데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고 날씨는 흐렸다. 1박 2일 동안 우리가 리조트에서 보낸 시간 대부분은 방 안에서 바람을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돈을 많이 쓰면 무조건 완벽한 여행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게 첫 번째 오산이었고, 겨울 제주의 날씨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게 두 번째 오산이었다. 다음에는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무리하게 풀빌라나 독채를 예약하기보다는, 그냥 바람 잘 막아주는 따뜻하고 조용한 호텔 방 하나 잡고 안에서 맛있는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카드 값 명세서를 미리 열어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댓글 3
  • 바람이 정말 불어서 고기를 밖에서 구워 먹은 걸 아쉬워요. 제가 겨울에 여행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거든요.

  • 그림의치 못한 부분이었던 건, 날씨 때문에 오히려 호텔에서 영화만 보다가 왔다는 점이네요.

  • 온천물 따뜻함은 잠시였지만, 바람이 얼마나 심했는지... 생각보다 훨씬 더 추웠네요.